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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게스트 하우스'정선의 달'-2013.7.14글 옮김
관리자 조회수:297 61.73.174.33
2017-07-25 18:03:44

달에서 보낸 사흘, 행복했습니다.

허클베리핀 | 2013.07.14 18:30 | 조회 1965

 

1. 서른이 되고나서부터

거의 쉬지 않고 계속 달렸던 것 같습니다.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해야 하는 때다.

일을 더 해야 하는 때이니 게으름 피우지 말자.

일을 하자.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자'던 20대를 다 보내고,

이제는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일'에 쏟아부어 보고 싶었습니다.

남자 나이 서른이면, 30대면 그럴 나이라고 누군가가 얘기했습니다.

그렇구나 싶었고,

그래야겠구나 했지요.

 

2년을 틀림없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네, '일'을 했지요.

좋아하는 일이었고, 잘 하는 일이었고, 해야하는 일이었습니다.

 

 

2. 저는 원래 여행을 좋아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대까진

거의 매해, 석 달에 한 번 정도는 외박을 곁들인 여행을 다녔고,

거의 매달, 두 주에 한 번 정도는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는 걸 즐겼지요.

 

사진을 찍고

기록을 하고

내가 만난 사람들과

내가 만난 풍경들과

내가 느낀 감각들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니

이게 참 쉽지가 않았어요.

사진기는 '일'을 위해 쓰여야 했고,

배낭은 한동안 방 구석에 가만히 놓여서 가끔 '일'을 위해 출장가는 용도로 쓰였지요.

 

'일'을 하다보니

짧은 여행도 몇 번 못 갔습니다.

올 초에 중국 청도에 잠깐 머리식히러 (내 여행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일행들과 들른 것 빼곤 기억나는 게 없네요.

작년에 '일' 때문에

강원도 평창에 7개월 간 있었지만,

그저 도시에 살지 않는다는 것 뿐, 그것을 '여행'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요.

 

 

3. 그래서 저는 정선엘 갔습니다.

올 초부터 '일'로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기어이는 탈이 나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에 대한 배려와

온갖 '일'들로 꽉꽉 들어차 '사람을 사랑할' 틈조차 없는 머리를 위한 위로 차원에서

금요일 하루 휴가를 쓰고

금토일 2박 3일 일정으로 짧은 여행을 준비했지요.

원래는 영월을 가려했습니다.

그런데, 휴가 떠나기 그 전주에 영월에서 '일'이 하나 들어왔어요.

영월에 가게 되면 괜히 '일' 하러 가는 기분이 들 것 같아

행선지를 바꿨습니다.

 

강원도는 제가 사랑하는 곳입니다.

10년 전 군대 전역하고

그 다음 해 여름에

남양주에서 동해바다까지 무전여행을 했어요.

혼자, 휴대폰도 없이, 주머니 속에 든 비상금 2만원으로

열흘 정도를 걸어서 여행했는데

그 때 강원도에 대한 애정이 듬뿍 생겨버렸지요.

 

그래서 마음이 복잡할 때 강원도엘 자주 들렀습니다.

그래도 정선은 이번이 세번째였어요. 자주 온 곳은 아니었지요.

 

이틀 동안 머물 곳을 찾았습니다.

혼자 민박에 들어갈까 하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자 마음 먹었습니다.

 

오랜만의 여행인데,

혼자 쓸쓸하게 보내긴 너무 아깝잖아요.

모르는 사람과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습니다.

또 혹시 압니까.

레이디 미스 강원이 어느날 갑자기 센치한 기분에 젖어서

혼자 여행이라도 다니다 마침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검고 딱딱한 얼굴의 서울 사나이와 사랑에 빠지게 될지.

아아.

여행은 여러 의미로 참 좋은 것 같습니다.




4. ... 레이디 미스 강원 따윈 없었습니다.

그냥 푸근하게 생긴 달지기(아저씨) 님이

마당을 다듬고 계셨죠...

 

게스트하우스 이름처럼 풋풋하고 낭만적이며 뭔가 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눈물 몇 방울 떨어뜨릴 것 같은 로맨스는

달지기 님의 화통한 인사에 그냥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네, 그래요. 이번 여행의 컨셉은 그냥 '잘 쉬다가 가자'가 되겠네요.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제가 만난 게스트하우스 <정선의 달>은 참 푸근하고 유쾌한 공간이었습니다.

간단한 공간 설명을 듣고,

사흘간 묵을 방을 배정받았지요.

 

 

5. <정선의 달>은 겉으로 보면 화려함과 거리가 먼 곳입니다.

요새 여기저기에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들이 알록달록 잘 꾸며져 있으면서,

좋은 시설까지 완비해놓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정선의 달> 게스트하우스는 오히려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이름처럼 오히려 토속적이면서 잔잔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 이 곳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골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가만히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얘기를 하거나

혹은 그저 멍하니 하루종일 앉아있어도 좋을 것 같은 오래된 나무마루와

촌스럽지 않은 창호지문이 좋았습니다.

그 문 안쪽으로 시골집 같이 대충 치워놓은 방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잘 정리된 이층침대방과 현대식 화장실, 샤워시설이 있어 조금 놀랐구요.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달지기 님과 대화도 나누며

해가 지는 걸 보았습니다.

 

점심 저녁을 거의 회사에서 해결하느라

평소에 먹을 기회가 없었던 (하지만 굉장히 먹어보고 싶었던)

짜파게티도 두 개나 끓여서 혼자 다 먹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볶음김치를 깜빡하고 사오질 않아 순수하게 짜파게티로만 배를 채웠지요.

... 짜파게티는 딱 하나를 먹을 때가 제일 맛있는 것 같습니다.

 

6. 첫째날 밤.

게스트하우스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요.

이곳을 10년 째, 매해 여름 들르셨다는 한샘가구 직원 여러분들, 우정여행 오신 듯 한 여자 분들 세 분이 모두 모여

고기 파티를 벌였습니다.

달지기 님과 한샘가구 직원 분들께서 고맙게도 먼저 불러주셔서 염치불구 동석하여 (짜파게티로 채워지지 못한) 빈 속을 가득 채울 수 있었지요.

공기 좋은 곳에서 마시는 술, 괜찮더군요.

 

고기파티 이후에는

낭만과 지성의 향연을 즐겼습니다.

달지기 님도 가세하여

이문세의 노래와 올드 팝을 잔잔하게 틀어놓고

두런두런 책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래요,

제가 바란 여행이 바로 이런 여행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과

치열한 삶 속에서도 지켜왔던 깊숙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나누는 시간.

그 시간들이 모여 만든 진솔한 세계.

그 세계 속에서 충만하게 공명하고 있는 사람과 사람들.

장작으로 피워낸 모닥불이 다 사그라들 무렵에서야

우리들의 세계는 막을 내렸습니다.

 

<정선의 달> 게스트하우스의 첫 밤이 그렇게 지나갔지요.

 










7. <정선의 달> 게스트하우스의 아침입니다.

사진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른 아침 일어나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산책해보시길 권유합니다.

 

혼자 일어나 사진기를 들쳐메고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았지요.

 

고요하고

편안한

시골마을입니다.

 

차도 위로

아주 가끔 다니는 차 말고는

매미 소리와 졸졸 물 소리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미친 척 길 한복판에서

씨스타 춤을 추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평화를 맞이했습니다.

 

마을 여기저기에 세워진,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하기도 힘든 큰 나무들과

잔뜩 쌓아놓은 장작더미들,

끼링끼링 지나가는 옛날 자전거 몇 대,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는 들풀들과 옥수수들.

평화,

평화,

그리고 평화.

 

단언컨대,

이 시간이 사흘 간의 정선 여행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8. <정선의 달> 게스트하우스의 아침식사입니다.

달지기 님이 직접 기른 상추 두 장을 넣어 만든 딸기잼계란토스트.

이틀 내내 아침식사로 이걸 먹었는데,

싱싱한 상추 때문인지

여름을 통째로 베어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달지기 님께

한 가지 건의사항이 있다면,

포도잼도 좀... 전 포도잼을 더 좋아하거든요. 하하하.

 

 





9. 사흘 있으면서 달지기님의 (외모완 다른) 남다른 감성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첨엔 좀 무섭긴 했지만요. (뭐지 이 사람...? 하면서)

의외로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시더라구요.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하고 물으면

"그냥 들짐승 사냥이나 다니지 뭘. 덫이나 놔가면서. 요새 맷돼지가 잘 잡히는 철이야." 하고 대답하실 것 같았는데,

진심으로 '모두의 마블'을 소일거리로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클로버 친구가 되었지만.

 

<정선의 달> 식사공간엔 저런 오브제들과 책이 눈길을 사로잡지요.

좋은 책들이 많이 꽂혀있더군요.

저도 다음에 여길 방문할 때 책 몇 권 가져와 기증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 방문객 끼리 책을 교환해도 좋을 것 같아요.

혼자만의 여행 중에 읽는 책은

나름의 맛이 있거든요.

 

 

10. 짧은 여행은 끝났습니다.

사흘 동안 나는 <정선의 달>에 머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좋은 곳을 돌아다녔고,

좋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지요.

 

편했고,

편안했고,

평화로웠습니다.

 

언제고 다시 가더라도

반겨주는 곳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지요.

 

(기어이 달지기 님과 형 동생 먹었습니다.

아마 다음에 가게 되면 스탭도 해야할지 모릅니다... 전 아직 달지기 님이 무섭거든요.)

 

몇 장의 사진과

몇 줄의 글로

제가 받은

감동과

즐거움을

모두 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선의 달>에서 보낸 행복한 사흘을

이렇게라도 보여드리면

그 다음에

그곳을 찾으실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올려보았습니다.

 

치열한 일상에 지친 분들이

저처럼

이곳에서

아주 짧게라도 행복을 만끽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조금 더 좋은 공간이 된 <정선의 달>에서

이 글을 읽으신 분들과

웃으며 조우하기를

기다려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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